국어사 –후기고대국어
국어사 –
후기고대국어
2부-2 - 고대2(10꼭지)
계림(鷄林)의 말이 한반도를 지배하다.-삼국통일(언어통일의 시작, 676),
원효(설동)의 ‘판비량론’ 바다를 건너다.(7C 후반) – 구결의 시작과 그 영향
설총, 경서를 신라말로 읽다.(8C 초) –이두 이야기
김대문, 이사금의 어원을 이야기하다.(8C 초) – 몇 가지 어원들
경덕왕, 땅이름을 바꾸다. -경덕왕의 신라 지명 한자 二字語式 통일(757) – 한자문화권의 한반도 정복
최초의 한류(韓流), 장보고(9C 초)
처용, 빼앗긴 것을 어찌할꼬.(9C 말) – 향찰 이야기
삼대목을 찾아라!(9C 말) – 도솔가에서 사뇌가까지
최치원, 계통을 따지다.(10C 초) – 몇 가지 수수께끼
발해의 언어
통일신라시대(후기고대국어)
계림의 말이 한반도를 통일하다 - 통일신라
1)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의의
-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가장 큰 의의는 전기 고대 시대에 적어도 세 곳(평양, 부여, 경주)의 언어 중심지에서 사용되던 언어가 하나의 언어 중심지(경주)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이 언어는 경주(계림)을 중심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낸 후(7C 후반 이후)에는 한반도 안에서 단일한 언어 중심체로서 약 300여년간 유지되며 다양한 이두, 향찰 자료들에 그 언어의 실체를 남겨놓은 명실상부 현대 한국어의 직접적인 조상 언어이다.
2) 삼국 언어 통합의 과정
- 이 세 언어는 본래 하나의 주류 언어(고조선어=맥계 언어)로부터 갈라진 언어로 추정되지만 언어의 발달 과정은 서로 상이하다.
- 고구려어
고구려어는 본래 맥계 언어의 하나인 부여계 언어의 방언으로서 전기에는 주로 국내성 중심의 토착 세력(맥계)의 언어가 주류 언어였겠지만 후기에는 평양성 중심의 신흥 세력(부여계 언어)이 언어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전기에는 중국민족과의 결합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던 데 비해서(유리왕 황조가 관련, 치희-화희 기사 참조) 고구려 전기의 말기에 해당하는 5C 초반의 광개토대왕 비문 등에서는 이미 한문문화권에 깊이 잠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문 문화권으로의 편입은 태학과 경당이 설치된 소수림왕대(372년) 이후로 판단되며 고구려 후기에 쓰여진 고구려 역사책인 유기 100권(5C 말?)이나 신집 5권(600년, 이문진) 등도 모두 한문 저작이라고 판단된다.
다시 말해서, 통일 신라에 의해 흡수된 고구려어는 전기에 주류를 이루고 있던 부여계 토착 방언으로부터 같은 부여계이지만 이주계 방언으로 언어 중심이 옮겨진 후 한문문화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후기 고구려어를 말한다.
- 백제어 : 백제어는 마한 54국 중 하나인 백제의 언어이다.
본래 마한(54국)은 부여계, 숙신계, (고)조선계, 한(韓)계, 한(漢)계, 기타 인도계? 등이 뒤섞인 부족연맹체이며 백제 등장 이전에는 진(辰)계 혹은 한(韓)계인 목지국의 언어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후 부여계인 백제가 나머지 54국을 통합함으로써 역시 맥계 언어의 하나인 부여계 언어(전기 고구려어, 고구려 입장에서는 부여의 토착 방언)가 주류를 이루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보다는 오히려 부여계 언어가 토착언어인 진(辰)계 혹은 한(韓)계 언어에 동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중국어에 흡수된 만주어, 몽고어 등을 참조할 것)
※ 6C에 저술된 <양서(梁書)>에서는 백제어에 중국어적 요소가 적잖이 포함되어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帽를 冠이라 하고 襦를 複衫, 袴(고)를 褌(곤)이라 한다.) 이와 같이 백제어에 한자어가 많이 뒤섞이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토착어와 이주계 언어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한자어가 등장했을 가능성도 있다.(실제로 현대 사회의 인도, 나이지리아, 필리핀 등 여러 다민족 국가들에서 주류사회와 비주류사회가 서로 다양하게 목소리를 내는 경우, 영어나 프랑스어 등 국제적으로 비중이 있는 외래 언어로 공용어를 삼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 신라 – 진한의 언어
신라의 언어는 본래 경주를 중심으로 한 12개 부족이 뒤섞여 있었는데 여기에는 부여계, (고)조선계, 한(韓)계, 한(漢)계 등의 언어가 통합되었으며 이 중 마한의 변방에서 한(漢)계 이주민의 언어가 뒤섞여 크레올어화(혼효어화)한 진한(辰韓)의 언어가 주류를 이루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 크레올어화(혼효어화)란, “어떤 언어가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언어와 뒤섞이게 되면서 형성된 피진어(간략한 문법, 부족한 어휘)가 오랜 시간을 거친 후 새로운 언어체계를 갖춘 언어로 재형성되는 일”을 말한다.
신라(=진한)의 언어가 크레올어화한 언어라는 가장 큰 증거는 현재 경상 방언에 남겨진 성조적 요소들과 중세국어까지 성조로 구별되던 일음절 품사통용어들의 존재이다.
경상 방언의 성조(굴곡성조)
.하늘, .바.람, .아래1(下), :아래2(前), ..
일음절 품사통용어들(명사~동사, 명사~형용사)
.신~:신-, .안~:안-, .~-, .배~배-, 빗~.빗-, 품~.품-,
.~.-, 풀~푸르-, 불~붉-, 노~노르다, 검(곰)~검다, 물~묽-
3) 통일 신라어의 실체
결론적으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 맥계 언어들 중에서 ①고구려어(=부여계 변종 언어), ②백제어(=부여계 언어와 진(辰) 혹은 한(韓)계 언어의 혼효어), ③진한어(辰韓語, 진(辰) 혹은 한(韓)계 언어와 중국[漢]계 언어의 혼효어) 간의 대립에서 진한어(辰韓語, 즉 신라어)가 주도권을 지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언어(통일신라어)에는 (차용어로서의 중국어와는 별도로) 한반도에서 기원한 단어 이외에도 중국어[漢]와 기원을 같이 하는 많은 단어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성조(聲調)와 일음절어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물론 이 언어는 이미 발생초기부터 언어적으로는 중국어와는 전혀 별개의 언어이며 진한어-중국어 간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통일신라의 언어자료 개관
<구결자료>
판비량론(671, 원효(617~686)) - 부호구결(각필, 점토)
<이두자료>
甘山寺 彌勒菩薩 造成記(719)
甘山寺 阿彌陀如來 造成記(719/720)
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755)
新羅村落文書(正倉院, 758)
葛項寺石塔造成記(785-798)
<향찰자료>
삼국유사 14편(서동요, 처용가, 제망매가 등)
※三代目(888, 진성여왕 때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
원효와 서동
1) 원효의 이름
<삼국유사>(4권, 5義解-元曉不覊)에 따르면 元曉의 속명은 다음과 같다.
聖師元曉, 俗姓薛氏. … 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 俗云毛也.](원효 선사는 속성은 설씨이고 … 어릴 때 이름은 서당이고 관명(어른이 된 뒤의 이름)은 新幢이다. 幢은 민간에서 ‘毛’을 말한다,) … 自稱元曉者, …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 皆以鄕言稱之始旦也(… 스스로를 ‘원효’라고 칭했다. … 원효도 역시 방언인데 당시 사람들은 모두 신라말로 그를 시단(설날아침)이라는 뜻으로 불렀다.)
⇒ ‘始旦’과 ‘新幢’의 의미관계를 고려한다면 誓幢은 ‘셔동’ 혹은 ‘동’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元曉라는 이름과 薛이라는 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이 단어들은 모두 ‘설동’이라는 이름의 차자표기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2) <판비량론>의 의의
<판비량론(判比量論)>이란
원효 저작.(671년)
7C말에서 8C초 일본으로 보내짐.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교수(2002년) 각필 발견.
뿌리 근(根)자 옆에 쓰인 ‘マリ’라는 글자다. 이 글자 중 ‘マ’자는 부(部)자의 오른쪽 부(우부방) 부분을 줄인 것이며 ‘リ’자는 ‘리(利)’자를 줄인 것으로 추정. 이중 ‘リ’자는 현대 일본 가타카나에서도 ‘리’로 읽는다. ‘부리’라고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는 주장이다.
‘공(共)’자 옆에 적힌 ‘궁(宮)’이라는 한자. 신라식 한자음으로 이해됨.
고대 한국어의 표기에 약체자로서의 구결자가 사용되었다.
일본에 영향을 미치어 가나자의 형성에 기여하였다.<추정>
※ 각필자료 <유가사지론>의 예<그림 파일 참조>
何 業 轉{耶}
설총, 경서를 신라말로 읽다
1) 薛聰은 누구?
신라십현(新羅十賢)의 하나. 통일신라기의 유학자.
6두품인 원효(薛幢/誓幢, 617~686)와 진골 출신인 요석궁주(瑤石宮主, ??~??,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김유신의 생질?) 사이에서 661년경 生. ※김유신(595~673), 김춘추(604~661), 문무왕(김법민, 626~681)
682년(신무 2) : 화왕계 올림.
이 이후 신무왕대(681~692)에 구경(九經)을 방언(方言)으로 해독한 것으로 보인다.
※ 九經이란 흔히 주역(易), 서경(書), 시겅(詩),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을 말한다.
719~720 : 甘山寺 佛像火光後記 작성.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름.
720~730년 사이 歿?
2) 관련 기록
<均如傳>(1075, 최행귀 序): 薛翰林 强變於斯文 煩成鼠尾之所致者歟(설한림이 억지로 한문을 바꾸었으나 번거롭게 쥐꼬리를 이룬데 그쳤을 뿐이다)
<三國史記 46>(1145, 김부식) : 薛總, 方言讀九經訓導後生至今學者宗之(설총이 방언으로 아홉 경전을 읽고 후학을 훈도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 그를 조종으로 삼는다)
<삼국유사 권4> ‘元曉不羈’(일연, 1285) 生薛聰 … 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설총은 … 方言으로 중국과 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六經과 文學을 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
<帝王韻紀> ‘신라조’(이승휴, 1289) 弘儒薛侯製吏書 俗言鄕語通科隸(홍유 설후가 이서를 지어서 속언과 향어가 과거에 통하게 되었다)
<大明律直解>(1395, 김지) 跋: 本朝三韓時薛總所製方言文字謂之吏道(우리 삼한 때 설총이 방언문자를 만든 바 있는데 이를 ‘吏道’라고 한다) – 이후에 ‘吏讀, 吏頭, 吏吐, 吏套, …’ 등의 기록이 나타남.
<쌍매당집 >(권22, 置國學條, 이첨:1345~1405) 其後强首․薛聰輩通曉義理, 以方言讀九經, 訓導後學, 卓然爲東方一時之傑... 그 후에 강수와 설총 등 여러 사람이 경전의 의리에 통달하여 방언으로써 구경을 읽고 후학들을 훈도하였으니, 우뚝하게 동방에서 한 때의 위인이 되었다.)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1444, 최만리) 新羅薛聰吏讀 雖爲鄙俚 然皆中國通行之字 施於語助 與文字元不相離신라 설총의 이두가 비록 비리하지만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이고 )
<훈민정음>(1446, 정인지 후서) 昔新羅薛聰 始作吏讀 官府民間至今行之 然皆假字而用 惑澁惑窒 非但鄙陋 無稽而已(옛날 신라 설총이 처음 이두를 만들어서 관과 민간에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 하지만 모두 한자를 빌어서 쓰는 것이어서 부족하기도 고 막히기도 하기 때문에 비단 비루하고 무계할 뿐이라)
<동국통감>(1484, 서거정) 其時强首薛聰輩 通曉義理 以方言講九經 訓導後學
<順菴集>(卷13, 安鼎福:1712~1792) 薛聰… 而薛雖元曉之子, 能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則卽是犁牛子之騂角者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李圭景(1788~?), 「經史篇」 1 - 「經典類」3 「經傳雜說」의 ‘경서구결본국정운변증설(經書口訣本國正韻辨證說)’ 중에서)
經書句節曰句讀, 中國則無方言, 以尋常言語, 已具文字, 故於句節處, 點句讀讀之, 故無如我東之原文外, 句讀作方言以讀之, 曰懸讀也, 俗稱懸吐, 無此懸讀則文意難解 故更名曰口訣, 新羅弘儒候薛聰, 以方言解九經, 敎授後學, 東儒之最醇, 無出其右, 高麗朝從祀文廟, 其方言解經者, 必爲口訣以無傳焉, 今只有吏讀(或稱吏道), 則簿牒句節處, 以方言懸讀, 衍成文字, 便於吏隸之告官, 其所謂解九經者, 恐如是也, 弘儒之世, 則唐時也, 其解經必取唐朝流來之句讀, 經義亦不失中原先賢之相傳受, 而竟無所遺傳, 則吾儒之不幸也
(경서의 구절을 구두라고 한다. 중국에는 따로 방언이 없고 일상 언어가 그대로 문자가 되기 때문에 글귀 뗄 곳에 구두만 찍어 읽는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원문 바깥 구두에 방언으로 토(두)를 달아 읽고(속칭 현토)라 하는데 토를 달아 읽지 않으면 글 뜻을 알기가 어렵다(이때문에 그것을 구결이라고 한다)는 사실과 같지 않다.
신라 홍유후 설총이 방언으로 구경을 풀이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유학자에서 가장 순수한 이로는 홍유후를 벗어나는 이가 없기 때문에 고려조에서 문묘에 종사하였다.
그가 우리말로 경을 풀이한 것을 구결이라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고 지금은 다만 이두(이도라고도 함) 가 있을 뿐이다. 즉, 문부와 서첩 등 글귀 떼는 곳에 우리말로 토를 달아 문장을 이루어서 아전들이 관청에 보고하는 데에 편케 하였으니, 그 이른바 구경을 풀이한 것도 이러한 것일 것이다.
홍유후의 시대는 곧 당나라 때였으므로 그 경전을 해석한 것이 반드시 당조에서 전해 온 구두일 것이며, 경전의 뜻도 중국 선현들이 서로 전수하던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인데 마침내 전해지지 못하였으니 우리 유가의 불행이다.)
3) 설총 이두제작설에 대하여
위에 보인 대부분의 견해와 기록들이 설총이 이두의 제작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사기> ‘설총전’의 ‘聰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至今學者宗之’ 대목에 대하여, 단재 신채호(1924)는 ‘口訣로써 구경을 독한 것이다’라고 본 바 있으나 김윤경(1938)이 설총을 ‘구결’이 아닌 이두의 창안자로 본 이후 70년대 구역인왕경의 발견 이전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설총을 이두의 창안자로 보았다.
※ 구역인왕경의 발견(1974) 이후, 상기 설총조의 기록은 이두(吏讀)에 대한 기록이기보다는 구결(口訣)에 대한 기록일 가능성에 대한 검토들이 많아지면서 吏讀는 주로 금석문이나 문서류 등 실용적인 표기에 사용된 것이고 口訣은 경전의 번역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가설로 되었다.
※ 김민수(1980)에서는 설총 이전에도 다양한 종류의 이두문이 존재함을 들어 설총을 이두의 창안자가 아닌 집대성자로 보아야 함을 주장하였음도 참조할 만하다.
이두(吏讀)=吏吐=吏道=吏書: 官吏의 글
이두는 관리들의 글라는 뜻으로 비록 한자로 쓰였지만 우리말 어순으로 쓰인 글을 총칭하는 말이며 설총 이전에는 주로 어순과 일부 개별적 단어들이 고안되었지만 설총 이후에는 문법형태소의 표기 등 전면적인 표기법이 정리된 것으로 이해된다.
1) 설총 이전의 이두문
迎日冷水里碑(503), 蔚珍鳳坪新羅碑(524), 蔚山川前里書石原銘(525), 蔚山川前里書石追銘(539), 丹陽新羅赤城碑(540), 壬申誓記石(552), 戊戌塢作碑(578), 南山新城碑銘(591?), 明活山城作成碑銘(611)
2) 설총의 이두문
- 甘山寺 彌勒菩薩 造成記(719) : 亡妣官肖里夫人/年六十六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之(망비 관초리부인이 66세에 고인이 되다. 동해 흔지변에 뿌리다.)
- 甘山寺 阿彌陀如來 造成記(719/720) : 年四十七古人成之東海/欣支邊散也後代追愛人者此善助在哉/金志全重阿飡敬生已前此善業造歲□/十九庚申年四月卄二日長逝爲□之(…47세에 고인이 되시어 동해 흔지변에 뿌리다. 후대 추애인(김지전)인 자가 이 선조(도움)겨재. 김지원 중아찬이 삼가 생 이전에 이 선업을 만들다. 69세. 경신년 4월 22일 장서하시다.)
3) 설총 이후의 이두문
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720?/755) 中..
天寶十三載甲午八月一日初乙未載二月十四日 …經 寫 時中 竝 淳淨爲內 新淨衣 褌水衣 臂衣 冠 天冠 等 庄嚴令只者 二靑衣童子 灌頂針 捧㢱 又 靑衣童子 着 四伎樂人 等 竝 伎樂爲㢱 又 一人 香水 行道中 散㢱 又 一人 花捧 行道中 散㢱 又 一法師 香爐 捧 引㢱 又 一法師 梵唄 唱 引㢱 諸筆師 等 各 香花 捧厼 右念行道爲 作處中 至者 三歸依厼 三反 頂禮爲內 佛菩薩 華嚴經 等 供養爲內 以後中 坐中 昇 經 寫在如
755년 8월 1일 초부터 756년 2월 14일… 경 베낄 때에 함께 순정한 신정의, 곤수의, 비의, 관, 천관 등을 장식시킨 두 청의동자 권정침을 받들며 또 청의동자 옆 네 기악인 등 함께 기악하며 또 일인 향수 가는 길에 뿌리며 또 일인 꽃 받들어 가는 길에 뿌리며 또 일법사 향로 받들어 이끌며 또 일법사 범패 불러 이끌며 모든 필사들은 각 향화 받들며 右念行道하여 만드는 곳에 이르면 삼귀의하며 세번 정례한 불보살 화엄경 등을 공양한 이후에 자리에 올라 경을 베끼다.
김대문, 이사금의 어원을 이야기하다 - 삼국사기
차차웅 : 南解次次雄立, 次次雄 或云 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 爲慈充. <三國史記 1卷-新羅本紀1-南解次次雄-元年條>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은 혹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방언으로 ‘무당’을 말한다고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위하고 제사를 숭상하는 까닭으로 외경하여, 마침내 존장자를 자충이라 하였다 한다.
이사금 : 儒理尼師今立, …儒理當立 以大輔 脫解 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 多齒 試以餅噬之 儒理 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 則云 尼師今, 方言也 謂齒理 昔南解 將死 謂男儒理 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 而嗣位焉 其後 金姓 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三國史記 1卷-新羅本紀1-儒理尼師今-元年條>
… 김대문이 말하기를, 이사금은 즉 방언으로서 ‘이의 금’을 의미한 말이니 옛적에 남해가 죽기 전에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 너희 朴昔 이성이 연장자로 왕위를 이으라 하였다. 그 후에 金씨도 일어나 세 성이 年齒(연치)의 많음을 따라 서로 왕위를 이은 까닭에 이사금이라 하였다.
마립간 訥祗麻立干立,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 謂橛也 橛謂誠操 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三國史記 3卷-新羅本紀3-訥祗麻立干-元年條>
눌지마립간이 위에 오르다. 김대문은, 麻立(마립)이란 것은 방언에 橛(말뚝/그루터기)을 이름이요 橛(말뚝)은 ‘삼가 붙잡다’의 뜻으로 ‘자리[位置(위치)]를 定(정)하여 두는 것’이니, 王橛이 主가 되고 臣橛은 아래에 벌여 있으므로 그와 같이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
=> 이 시기가 되면 이미 신라 초기의 언어(내물왕 혹은 미천왕 이전의 언어)는 ‘해석’되어야 할 존재이며 이미 민간어원이 설득력이 있을 정도로 일반인의 언어로부터 멀어진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김대문 어원론에 대한 해설
차차웅은 ‘스승’의 차자표기로, 자충은 ‘중’의 차자표기로 해석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승려가 종교적 행위 외에도 스승의 역할을 했기 대문에 ‘스승-중-존장자’의 연결이 어원론적으로 볼 때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중’의 경우 ‘승(僧)’의 차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니사금을 ‘닛금’의 차자표기로 보는 견해는 단어형성론적 입장에서 볼 때 타당한 견해로 해석할 수 있지만 어휘의미론적 입장에서 볼 때는 견강부회 혹은 민간어원적 성격의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세국어의 ‘님금’의 경우는 ‘님(主)+검(王)’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 경우를 고려한다면 ‘단군왕검’의 ‘왕검(王儉)’이야말로 ‘님금’의 어원적 단어일 수 있다.
마립간의 ‘마리’를 ‘우두머리[首長]’의 의미로 해석하는 입장에서는 ‘말뚝’의 ‘말’로 보면서도 그 어원적 해석을 ‘맏-<맡-)’(ㄷ불규칙용언, 마름(舍音) 참조)으로 보는 김대문의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경덕왕, 땅이름을 바꾸다.
경덕왕 : 신라 지명을 二字語式 한자어로 통일(757) – 법흥왕 이후 가장 강력하고 전국적인 한자어 정책.
고구려, 백제, 신라계로 갈라져 있던 전국의 지명이 한자식으로 통일됨.
12월에 沙伐州[사벌주]를 고쳐 尙州(상주)라 하고 州(주) 1․郡(군) 10․縣(현) 30을 領屬(영속)케 하고, 揷良州[삽량주]를 良州(양주)라 고치어 주 1․小京(소경) 1․군 12․현 34를 영속케 하고, 菁州[청주]는 康州(강주)라 고쳐 주 1․군 11․현 27을 영속케 하고, 漢山州[한산주, 서울]는 漢州(한주)라 고쳐 주 1․소경 1․군 27․현 46을 영속케 하고, 首若州[수약주, 춘천]는 朔州(삭주)라 하여 주 1․소경 1․군 11․현 27을 영속케 하고, 熊川州[웅천주, 공주]는 熊州(웅주)라 하여 주 1․소경 1․군 13․현 29를 영속케 하고, 河西州[하서주, 강릉)]는 溟州(명주)라 하여 주 1․군 9․현 25를 영속케 하고, 完山州[완산주, 전주]는 全州(전주)라 하여 주 1․소경 1․군 10․현 31을 영속케 하고, 武珍州[무진주, 광주]는 武州(무주)라 하여 주 1․군 14․현 44를 영속케 하였다.[良州(양주)는 혹 梁州(양주)라고도 씀].
최초의 한류(韓流), 장보고
신라방(新羅坊)의 설치
750년(경덕왕 9)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가 다시 가까워지면서 두 나라 사이에 교역이 활발해지고, 많은 신라인들이 당에 가서 거주했다.
자치구 신라방
산둥(山東) 반도 남쪽의 해안 일대와 화이허(淮河) 강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주로 거주하면서 신라인 촌락을 형성. - 추저우(楚州)와 롄수이(漣水)에서는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있었으며, 그곳의 장(長)인 <총관(總管)>이 행정을 관장했고 그 아래에 교섭업무를 주관하는 <역어(譯語)>와 <전지관(專知官)>이라는 관리가 있어 신라인과 관련된 사무를 전담했다.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칭닝 향(淸寧鄕) 츠산 촌(赤山村)의 신라인 통할 관청인 구당신라소의 장은 <압아(押衙)>라고 불렸으며 이곳에는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신라 사원, 법화원(法花院)이 있었다.(승려 42명, 비구니 3명, 노파(老婆) 2명이 상주, 신라인 신도가 250명)
이들은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국제무역을 활발히 전개 : 양저우(揚州)•밍저우(明州)•쑤저우(蘇州) 등지를 중심으로 아랍•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했고, 일본과 신라 본국을 왕래하면서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처용, 빼앗긴 것을 어이할꼬
향찰: 우리말의 전면적 표기. 문학작품에 주로 사용. 문법형태소 뿐 아니라 말음 첨기를 사용하여 우리말 형태소를 전면적으로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처용가(處容歌)
東京明期月良 동경 기
夜入伊遊行如可 밤드리 노니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드러 보곤
脚烏伊四是良羅 로리 네히어라
二肹隱吾下於叱古 두흘은 내하엇고
二肹隱誰支下焉古 두흘은 뉘하엇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 내하이다마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아 엇다리고
서동요
善化公主 主隱 他密只 嫁良 置古 선화공주 니림은 남 그윽이 얼어 두고
薯童房乙 夜矣 卵乙 抱遣 去如 서동(의)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가다
어휘
고유
명사 : -ㅁ(夜音, 雲音, 心音, 憂音, 誓音, 岳音), -ㄹ(道尸, 秋察尸, 斤尸, 日尸), -ㅅ(際叱, 城叱), -ㄴ(一等隱, 千隱) 川理, 世理, 岩乎, 母史,
※朴, 尼, 今, 嘉俳, 柯半, 洗, 尉解, 牟羅, 阿孩, 舒弗/舒發, 波珍, 勿, …
대명사: 吾, 汝, 五里
수사: 一等隱, 二尸, 千隱, ※悉(悉直=三陟)
동사: 奪叱-, 折叱-, 修叱-, 餘音-, 慕理-, 持以-,
형용사: 有叱-, 無叱-, 吉-, ※ 赫居/弗矩-, 健-, 居柒-, 韓/翰-
부사: 唯只, 必只, 密只, 本矣, 不喩, 不冬, 毛冬
한자 : 君臣, 百姓, 聖人, 身體, 衣服, 風俗 등
차용: 부텨(佛體), 자(尺), 뎌(笛), (褥), 절(刹), 붇(筆) 먹(墨), 뵈(布), 게(蟹), 대(竹), 무늬(紋),
혼효 : 烏斯含(고구려어) = 兎(중국어) => ‘톳기’(신라어>중세한국어) ※우사기/うさぎ(일본어)
삼대목을 찾아라
삼대목의 출간
888년, 진성여왕 대에,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향가집.
책이 전하지 않아 권수와 책수 등은 알 수 없다. 단지, ‘삼대’라는 말이 신라의 상대•중대•하대를 뜻하고, ‘목’은 절목(節目) 혹은 요목(要目)이라는 뜻으로, 내용의 분류체계의 조목에 쓰였다고 추정된다.
신라를 삼대로 나누었다면, 상대(박혁거세~미천왕 : BC1C~4C), 중대(내물왕~태종무열왕: 4C~7C), 하대(문무왕~진성여왕:7C~9C) 정도로 나누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대와 중대는 왕조와 시대변화를 중심으로, 중대와 하대는 삼국통일을 중심으로 나누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치원, 계통을 따지다
857년(헌안왕 1년), 6두품으로 태어나 13세(869, 경문왕 9)에 당나라에 유학, 18세(874년)에 중국 과거에 급제, 문명을 떨친 후 29세(885년)에 귀국하여 한림학사가 되었다. 38세(894년)에 국정 시무책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각지의 태수를 역임하다가 관직을 내놓고 각지를 유람하다가 인생을 마쳤다.
그 文集에 '上大師侍中狀'(대사시중에게 올리는 글)이 있으니, 거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듣건대 東海 밖에 三國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馬韓, 卞韓, 辰韓이며, 馬韓은 高麗요 卞韓은 百濟, 辰韓은 新羅다" 고려, 백제가 全盛하였을 때에는 强兵이 100만이어서 南으로는 吳越을 侵攻하고 北으로는 幽(유)․燕(연)․齊(제)․魯(노)의 地域을 흔들어서 중국의 큰 頭痛이 되었으며, 隋皇帝의 失勢는 저 遼東征伐로 말미암은 것이다 云云. <삼국사기 권46 열전6 崔致遠 條>
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마한은 高句麗이고, 辰韓은 新羅다."(<三國史記> 本紀에 의하면 新羅는 먼저 甲子년에 일어났고, 高句麗는 그 뒤 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에 말한 것은 朝鮮王 準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東明王이 일어날 때에 馬韓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高句麗를 馬韓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은 혹 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馬韓을 百濟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된 말이다. 高句麗 땅에 본래 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馬韓이라 한 것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馬韓 조>
崔致遠은 "변한은 바로 百濟"라고 했다. 本紀를 상고해 본다면, 온조왕(溫祚王)이 일어나서 나라를 세운 것은 홍가(鴻嘉) 4년 甲辰(BC17)의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赫居世나 東明王 시대보다 40여 년이나 뒷일이 된다. 그런데 唐書에, 卞韓의 후손들이 樂浪 땅에 살았다고 한 것은 온조왕(溫祚王)의 계통이 東明王에게서 나온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낙랑에서 나서 卞韓에 나라를 세우고, 馬韓 등과 대치한 일이 온조왕 이전에 있었던 모양이며, 그 도읍한 곳이 낙랑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卞韓 조>
또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진한은 본래 燕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그런 때문에 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邑과 마을을 沙涿(사닥)•漸涿(점닥)이라고 불렀다."(新羅 사람의 方言에서 涿의 音을 道라고 했다. 때문에 지금도 혹 沙梁이라 하는데, 梁을 道라고도 읽는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辰韓 조>
발해의 언어
발해의 인적 구성
<舊唐書> 卷199下, [北狄, 渤海靺鞨] / <冊府元龜> 卷959, 土風
발해말갈(渤海靺鞨)의 大祚榮은 본래 高句麗의 別種[高麗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祚榮은 家屬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가 살았다. (中略) 聖曆(則天武后) 年間에 스스로 振國王에 올라 突厥에 사신을 보내고 통교하였다. .. 남쪽은 신라와 서로 닿고,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부로 흑수말갈(黑水靺鞨)까지 지방이 2천리에 민호가 십여만이며, 승병(勝兵)이 수만명이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 및 典籍[書記]도 상당히 있다
<金史> 卷1, 世紀
속말말갈은 동모산에 의지해 있다가, 후에 발해가 되었다. 왕을 칭하였으며 10여대가 이어졌다. 문자와 예악, 관부제도가 있었으며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발해 멸망 후 대거 고려로 이주
高麗 太祖 8年(925년) 9월 6일,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하였다. 10일에 발해 예부경 대화균,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이 민 100호를 데리고 내부하였다({高麗史}1, [世家]1).
高麗 太祖 8年(925)12월 29일 발해좌수위 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민 1000호를 데리고 내부하였다({高麗史}1, [世家]1).
3. 高麗 太祖 11年(928) 3월 2일에 발해인 김신 등 60호가 내투하였다({高麗史}1, [世家]1).
4. 德宗 元年(1032) 5월 7일에 발해의 薩五德 등 15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5. 德宗 元年(1032) 6월 12일에 발해의 于音 若已 등 12인이 내투하였다. 16일에 발해의 首乙分 등 17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6. 德宗 2年(1033) 4월 발해의 首乙分 등 18인이 내투하였다. 23일에 발해의 가수 등 3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7. 德宗 2年(1033)5월 29일에 발해의 감문대 정기질화 등 19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8. 德宗 2年(1033)12월 21일에 발해의 奇叱火 등 11인이 내투하자 남쪽지역에 살게하였다({高麗史}5, [世家]5).
발해에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가 있었다.
발해 언어
왕을 '가독부', 또는 '성왕', 또는 '기하'라 하고, 命은 '敎'라 하며, 왕의 아버지는 '老王', 어머니는 '太妃', 아내는 '貴妃', 長子는 '副王', 다른 아들들은 '王子'라 한다({新唐書}卷219, [北狄, 渤海]).
발해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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