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방송은 매스미디어의 한 영역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다. 여러 독립라디오방송국과 함께 BBC 라디오1과 라디오2는 매주 수백 시간 방송을 한다. 재즈는 런던과 서북부의 재즈FM 이외에도 전문 라디오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들을 수 있다. BBC 라디오3과 독립방송국 클래식FM은 전국을 대상으로 클래식음악을 방송하고 있다.
뮤지션들은 대체로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음악활동을 시작하지만 왕립음악대학(Royal College of Music), 길드홀 음악 및 드라마 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 and Drama), 트리니티 음악대학(Trinity College of Music)과 같이 런던 중심지에 있는 명문교에서 수학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런던 외곽지역의 주요 명문교로는 글래스고에 있는 왕립스코틀랜드 음악 및 드라마학원(Royal Scottish Academy of Music and Drama)과 카디프에 있는 웨일즈 음악 및 드라마대학(Welsh College of Music and Drama)이 있다.
대중음악이 더욱 다양화되면서 최근에, 팝 뮤지션들이 재즈나 클래식 음악에서 그 영향을 받아 창작한 곡을 취입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또 반대로 재즈나 클래식 음악 연주가들 역시 대중가요를 취입하는 추세도 강하다. 파바로티와 같은 성악가들의 음반이 영국의 대중 음반순위차트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순수 클래식음악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1996년 한해동안 음악CD 가운데 클래식음악의 매상은 6.4%에 불과했다. 더욱이 전곡을 수록한 교향곡이나 오페라는 거의 팔리지 않는 실정이다. 단지 인기 클래식작품만을 선정하여 발췌한 음반만이 겨우 판매되고 있다.
초기 대중음악
19세기 전, 영국에서 가장 보편적 음악형식은 포크음악(folk music)이었다. 음악에 이야기와 정보가 담겨 있었으며, 대개 작곡가의 지방과 직업이 음악에 드러났다. 그러나, 시골에서 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19세기 초반, 포크음악의 전통이 쇠퇴하였다.
도시가 확대되면서 대중오락은 더욱 광범위해지고 다양해졌다. ‘연예관’으로 불리는 선술집과 극장이 생겨나 다양한 노래 및 코미디 쇼를 보여주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연예관의 체인점이 전국 도시에 문을 열었다. 런던이 에이전트, 작사/작곡가, 뮤지션, 연주가를 위한 음악활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지역적 특색이 사라졌다.
전문적으로 작사/작곡하는 경우에는 큰 수익이 보장되었다. 작사/작곡가와 음반제작자들은 자신이 발표한 노래 또는 시트뮤직(sheet music: 책으로 매지 않고 한 곡 단위로 인쇄한 악보)에서 약정 금액이나 ‘로열티’를 받았다. 19세기 말부터 상업적으로 대중오락과 음반이제작되었다. 사람들은 연예계를 ‘틴 팬 앨리(Tin Pan Alley)'로 불렀으며, 그 중심지는 런던의 덴마크 스트리트(Denmark Street)였다.
1920년대 초 전통 재즈 및 ‘래그타임(ragtime)' 음악이 미국에서 수입되었다. 이러한 음악의 반주에 맞춰 추는 춤은 복잡한 유럽식에 비하여 배우기가 쉬웠기 때문에 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춤 열풍이 휩쓸면서 전국적으로 댄스홀이 문을 열었다.
1930년대에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와 ‘오크라호마’와 같은 미국뮤지컬이 수입되었다. 영국인들은 콜 포터와 조지 거쉰의 편안하고 신비스러우면서도 유혹적인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쿠르닝(crooning)'이라 불리는 이러한 창법은 청중에게 개인적인 친밀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영국에서 그래시 필드, ’연합군의 연인‘으로 불린 베라 린을 위시하여 많은 여성가수들이 성공을 거두었다. 또 모던재즈의 자유로운 사운드, ’비밥‘(bebop)도 미국으로부터 수입되었다. 혼돈과 역설, 반항적인 성격이 강한 이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집중과 인내심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비밥은 주로 지성인들이 즐겨 듣는 음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대중음악은 대개 느리고 감상적인 발라드가 주류를 이루었다. 프랭크 시나트라, 페리 코모, 마리오 란자, 딘 마틴과 같은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 이러한 종류의 노래를 불렀다. 영국의 저음가수로는 프랭키 보건, 디키 발렌타인, 로티 힐튼이 유명하였다. 편안하면서도 율동적인 이들의 노래에는 세련되고 우아한 춤이 함께 어우러졌다.
축음기와 레코드가격이 저렴해지고 1955년 소니(Sony)사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출시하면서 청취자의 수가 급증하였다. 라디오 방송국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젊은 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음악프로그램을 생방송 하였다. 광고가 방송국의 주요 수입원을 차지하면서 음악 프로그램이 보다 활성화되었다. 방송국이 3분 미만의 짧은 노래를 요구하면서 이에 따라 상업적 뮤지션들은 짧고 감각적인 노래를 만들었다.
1955년경, 미국에서는 자유와 번영, 소비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욕구가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완전고용이 이루어졌고, 기업들은 부유한 십대들을 대상으로 제품의 마케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물질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러시아와 사실상 전쟁상태였고, 정치는 긴장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부모세대가 일궈놓은 세상을 경멸하였고 영화에서는 반항적인 이미지를 내세운 새로운 영웅 상을 부각 시켰다. 미국인 배우 말론 브란도와 제임스 딘은 각기 ‘와일드 원’(The Wild One, 1953)과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 1955)에서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성난 젊은이의 역할을 맡았다. 제임스 딘이 사망한 해인 1955년에 영화 ‘블랙보드 정글(Blackboard Jungle)'이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기존의 사회질서에 격렬하게 반기를 드는 젊은 학생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의 주제가인 ‘하루종일 로큰롤을(Rock Around the Clock)’은 무명가수인 빌 헤일리와 그의 밴드 코메츠가 불러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이 영화가 영국에서 상영되었을 때 그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젊은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도중에 좌석에서 일어나 뛰듯이 춤을 추었고, 주제가는 싱글판으로 5개월 동안 영국 최고의 인기 레코드가 되었다. 이런 흐름에 맞추어 제작한 동명의 영화가 1965년에 개봉되었을 때 많은 영화관에서 소란과 파괴적 행위들이 속출하였다. 일부 시 당국에서는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기도 했다. 한편, 의회와 경찰서, 종교계 및 언론에서는 이 영화가 청년에 미치는 영향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는데, 마치 화성인을 태운 우주선이 런던에 불시착한 것처럼 소동이 이어졌다.
‘로큰롤’이란 말은 처음에 미국인 DJ 알랜 프리드가 컨트리음악, 블루스, 재즈, 종교음악(일명, 가스펠)이 칵테일처럼 혼합된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로큰롤은 척 베리와 같이 흑인뮤지션들이 주로 연주하였는데, 로큰롤의 명칭은 노래의 제목과 가사에 ‘록(rock)’과 ‘롤(roll)’이 자주 언급된 데서 유래하였다. 이 말은 흑인영어로 ‘성교하다’ 또는 ‘연애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대중들이 본래의 이 뜻을 잘 모르면서 원래의 사전적인 의미를 잃게 되었다.
로큰롤의 수입으로 영국의 청년문화는 큰 영향을 받았다. 초기의 팬들 중에 ‘테디 보이즈’ 또는 ‘테드’로 잘 알려진 ‘뉴 에드워디언’이 있었다. 이들이 즐겨 입던 옷깃과 주머니에 벨벳을 댄 정교한 롱 재킷은 원래 국왕 에드워드7세(1901-10) 시대에 젊은 남성 귀족들이 즐겨 입던 스타일이었다. 이 재킷은 ‘구두끈’ 넥타이와 ‘배수관’ 모양의 좁은 바지, 밝은 색의 양말, 두툼한 고무 구두창을 댄 무두질한 양가죽 신발, 그리고 위로 올려 뒤로 넘겨 브릴크림을 바른 헤어 스타일 등이 함께 유행하였다.
‘테드’는 획일성, 엄격함, 권위를 혐오하였으며, 이따금 문화적 파괴행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매스미디어는 이들을 사회의 적인 반항집단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스키플(Skiffle)
1953년경에 ‘스키플’로 불리는 어쿠스틱 계열의 음악이 런던 소호지역의 클럽을 무대로 나타났다. 빠르고 율동적인 스키플은 최소한의 음악 기술만 있으면 작곡이 가능했다. 또한, 스키플의 연주에는 많은 악기가 필요 없었다. 또 가수의 목소리에 리듬감을 실어 활력을 주기 때문에 다른 음악과는 차별화 되어 빠르게 파급되었다.
로큰롤의 경우처럼, 스키플은 흑인과 미국에서 유래했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쉽게 스키플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음악지식이 없고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젊은이들도 악기만 있으면 독학으로 연주를 할 수 있는 D-I-Y(do-it-yourself: 제 스스로 하기) 음악혁명이 시작되었다. 로니 도네건, 켄 코일러와 같은 스타들이 등장하였다. 도네건의 Rock Island Line(1956)은 미국의 음반순위차트에서 6위까지 오르는 등 미국에서 판매의 호조를 기록한 최초의 영국 레코드가 되었다. 스키플은 상업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사실상 누구나 스키플을 연주할 수 있었다. 특히, 예술학교의 젊은 좌파 인텔리계층에 인기가 있었는데 이들은 스키플의 고유한 기본 사운드를 민주적인 사운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대중음악이 음악산업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그룹사운드의 공연장이 많이 개설되었다. 특히 팝음악의 세계적 흐름에 초점을 맞춘 곳이 리버풀이었다. 세계주의적 성격을 지닌 이 항구도시의 클럽, 커피숍, 댄스홀 등에서 사람들은 시와 재즈를 즐길 수 있었으며 지방 팝음악 전문지인 Mersey Beat도 발행되었다. 이곳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그룹이 나왔다. 바로 비틀즈였다.
비틀즈의 역사는 무명의 리버풀 스키플밴드 쿼리멘에서 시작된다. 이 밴드는 4명의 리버풀 출신 노동자로 구성되었다. 존 레논(1940-80), 폴 매카트니(1942년생), 조지 해리슨(1943년생), 링고 스타(리처드 스타키, 1940년생)가 바로 그들이다.
비틀즈의 초기 멤버는 이들도 아니었고 밴드이름도 비틀즈가 아니었다. 그러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새로운 매니저로 오면서 이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Love Me Do'(1962)로 대성공을 거둔 후 2년 동안 비틀즈는 ‘She Loves You', 'I Want To Hold Your Hand', 'Can't Buy Me Love'와 같은 신선하고 경쾌한 곡들을 싱글판으로 선보여 영국의 음반순위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비틀즈는 장발에 흰 셔츠, 좁은 타이, 검은 양복을 트레이드마크처럼 입고 다녔다. 멤버들의 건방진 태도까지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질 정도였다. 비틀즈가 나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팝 그룹들은 미국의 유명 히트곡을 모방하거나 전문 작사작곡가의 곡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비틀즈의 히트곡 대부분은 레논과 매카트니가 직접 쓴 것이며, 각기 리드싱어로 자신의 노래를 불렀다.
1963년에 The Sunday Times는 비틀즈를 ‘베토벤 이후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하였다. 1965년에 노동당 수상 해럴드 윌슨은 비틀즈에게 MBE(Member of British Empire, 대영제국국민훈장)를 수여하였다. ‘비틀매니아(Beatlemania)’로 불릴 만큼 비틀즈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 비틀매니아는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열광적이었다. 1966년 비틀즈의 열풍이 몰고 온 병적인 흥분상태가 극도로 치닫게 되자 결국 비틀즈는 순회공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틀즈는 그룹으로서 성공을 거두면서 솔(soul)풍의 ‘Got to Get You into My Life'에서 유머가 담긴 ’When I'm Sixty Four'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1967년에 비틀즈는 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발표하였다. 이 음반에는 노래 한 곡 한 곡이 다음 곡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으며, 레코드재킷에는 가사 내용이 인쇄되었다. 비틀즈는 마약과 신비주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신곡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했다. 이 앨범은 인텔리 계층을 사로잡았으며 팝음악이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1967년 매니저가 사망한 후에는 각 멤버들 사이에 재정문제와 추구하는 음악세계에 대한 견해차이가 심각했다. 1970년에 비틀즈의 각 멤버는 솔로 앨범을 내놓았으며, 같은 해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미국에서 15개의 넘버원 앨범과 21개의 넘버원 싱글판, 영국에서 13개의 넘버원 앨범 그리고 17개의 넘버원 싱글판을 내놓은 후의 일이었다.
영국의 리듬앤블루스(rhythm and blues)
영국의 대표적인 리듬앤블루스 연주자는 알렉시스 코너와 그의 밴드 블루스 인코퍼레이티드였다. 이 밴드는 세계 최초의 백인블루스그룹으로도 유명하다. 1962년에서 1967년 동안 이들은 애니멀즈, 야드버즈 (에릭 클랩톤, 제프 베크 참여),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 (스티브 윈우드 참여), 플리트우드 맥, 롤링 스톤스를 포함한 새로운 영국 그룹사운드에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스타일은 영국의 리듬앤블루스(알엔비, r'n'b)로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에 이들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음악을 연주하는 이국적인 뮤지션으로 비쳐졌지만, 곧 열광적인 팬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롤링 스톤스
초기 영국 알엔비 그룹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오랫동안 활동한 그룹은 롤링 스톤스이다. 롤링 스톤스는 1962년에 미크 재거(1943년생)가 조직하였다. 재거는 런던대학의 경제학부를 중퇴하고, 곧이어 키스 리처드(나중에 리처즈, 1943년생), 브라이언 존스(1942-69), 빌 위먼(윌리엄 퍼크스, 1936년생), 찰리 와츠(1941년생)와 합류하였다. 앤드류 루그 올드햄이 매니저를 맡았으며, 비틀즈의 음악세계나 그 당시 기타 그룹사운드가 추구했던 보수적인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난폭하고 섹시하며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그당시 대부분 팝 그룹들이 언론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반면에 스톤스는 상업적 성공때문에 뮤지션으로서의 자존심을 저버리는 일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에 기성세대들은 심한 거부감을 보였지만, 신세대 팬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비틀즈처럼 스톤스도 작사,작곡을 했다. 대개 재거가 노랫말을 짓고 리처드가 곡을 붙였다. 이들의 초기 곡(1996년의 Aftermath 앨범에 수록)의 리듬과 주제는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65년에는 스톤스는 ‘(I Can't Get No) Satisfaction'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최초의 넘버원 싱글을 기록하였다. 1968년에는 ’Jumpin' Jack Flash'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두 곡을 통해 스톤스는 절정에 달한 힘과 음악성으로 이국적인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미국과 영국에서 스톤스보다 많은 앨범 히트곡을 발표한 그룹은 없다. 그룹이 조직된 지 30년이 넘었어도 전 세계적으로 이들의 라이브 공연은 계속해서 관중동원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모드(Mods)!
비틀즈와 스톤스는 공연으로 영국의 음악팬들을 매료시켰다. 반면에 미국 흑인과 카리브 흑인의 주요 음악스타일로 팬들을 사로잡았던 솔(출처: Tamla Motown Label)과 자메이카 스카(또는 ‘블루비트’)가 있었다. 이 음악스타일은 강하고 규칙적인 박자가 특징으로 댄스와 잘 어울렸다. 1960년대 초 런던의 물질적 풍요속에 이 음악스타일은 팝과 비견될 만한 인기를 누렸다. 당시에는 라이브로 댄스뮤직을 연주할 수 있는 밴드가 많지 않았던 까닭에 클럽들은 레코드 또는 ‘디스크’를 이용하여 음악을 틀었다. 이것이 ‘디스코텍’이 되었다. 1964년에 런던의 워두어 스트리트에 최초의 라 디스코텍(La Discotheque)이 문을 열었다.
‘모드(mods)'로 일컫는 패션에 민감한 런던청년들은 한동안 독특한 스타일을 입고 다녔다. 전형적인 남성 복장으로는 단추 3개 달린 가벼운 유럽 정장, 구멍 2개의 재킷, 좁은 바지, 옷깃에 단추가 달린 셔츠, 좁은 넥타이, 자크식 부츠, 단발, 방한용 녹색 스키복(‘파카’) 등이 유행했다. 여성 스타일로는 트위기, 진 쉬림톤, 매리 퀀트와 같은 최고의 모델들이 유행시킨 미니 스커트, 밝고 진한 화장, 진한 마스카라, 단발 직모 등이 특징이었다.
소비지향주의는 모드 스타일의 핵심적 요소였으며, 1964년경 런던 모드족들은 스쿠터를 타고 브라이튼으로 갔다. 브라이튼은 ‘로커’ 그룹들이 경연을 벌이는 장소로 유명해진 해변휴양지였다. ‘로커’들은 노동자계급문화를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들의 주요 특징은 오토바이, 가죽재킷, 데님이 달린 청바지, 장발이었다. 미국 영화 ‘와일드 원’(The Wild One, 1953)과 ‘이유 없는 반항’(Rebel Without a Cause, 1955)에서 선보인 1950년대 초반의 폭주족들을 흉내낸 것이었다. 모드 스타일은 후(Who)와 스몰 페이스의 인기에 힘입어 점점 큰 영향력을 갖게되면서 록음악 확산에 일조를 하였다.
‘I Can't Explain'(1965)은 Who의 최초 히트곡이 되었다. 로저 달트리의 강렬한 음정, 피트 타운스헨드의 개조 기타코드, 존 엔트휘슬의 제트엔진 베이스, 키스 문의 우울한 색조를 띤 드럼을 통해 음악적 자신감과 기존질서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냈다. 이들은 오만하고 예측불허의 행동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공연이 끝나면 자신들의 악기를 때려 부셔 팬들을 즐겁게 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My Generation'(1965)은 구세대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신세대에 관한 난폭한 음악적 선언을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남성 모드 밴드가 크게 성공을 거둔 반면에, 영국팝에는 여성가수들이 거의 없었다.
룰루, 더스티 스프링필드, 실라 블랙 등은 처음에 재즈풍과 카바레 스타일의 감상적인 노래를 불렀으나 나중에는 가수로서가 아닌 다른 연예비즈니스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솔(Soul)과 레게(reggae)
1960년대에 자메이카와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흑인음악은 계속해서 인기를 누렸다. 가벼우면서도 조악하며 율동적인 스카(ska)는 프린스 버스터와 저지 드레드와 같은 아티스트들에게 일시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스카와 레게는 비롯하여 인종주의와 폭력을 일삼는 ‘스킨헤드’와 같은 거친 하위문화에서도 유행되었다. 이 음악에 심취한 극성팬들은 히피와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집단 이외에도 흑인과 아시아인을 공격하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이들은 옷깃에 단추가 달린 셔츠에 꼭 죄는 짧은 리바이 진(바지)과 무거운 부츠를 착용한 유니폼에 민대머리를 하고 다녔다. 영국의 축구경기장에서 축구훌리건들의 난폭한 행위도 여기서 시발점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팬들은 60년대 초반의 무명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선호했다. 나중에 상업적으로 제작된 음반들보다 훨씬 독창적이고 표현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음반들은 대량으로 제작되지 않았던 탓에 매우 귀한 편이었다.
프로그레시브 음악
1960년대 중반 대중음악은 다양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일부 뮤지션들은 더 이상 라디오 방송이나 음반순위차트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비틀즈는 이미 Rubber Soul(1965), Revolver (1966), Sergeant Pepper(1967)와 같은 프로그레시브 앨범에서 장편의 가사와 사운드를 바탕으로 한 실험적인 곡들을 연주했다. 많은 뮤지션들도 기존의 3분 짜리 팝송의 제한규정을 거부하고 장편의 곡들을 LP에 수록하기 시작하였다.
프로그레시브 선두주자로 핑크 플로이드와 소프트 머신에 이어 예스, 제너시스(나중에 필 콜린스 참여)와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의 열성적인 팬들은 대학 및 예술학교 출신의 주로 중산계급이었다. 1970년경부터는 일부 그룹들이 특정 테마를 기초로한 일련의 곡들을 중심으로 컨셉 앨범을 발표하였다. 프로그레시브 뮤지션들은 비록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존의 팝 계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1970년대에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은 유난히 긴 독주곡, 장황한 노래가사, 웅장한 관현악편곡, 화려한 의상 등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처음에 알엔비로 시작한 기타 뮤지션들의 음악은 블루스와 록음악으로 발전하였다. 판타지, 반복적인 기타 ‘리프(riffs)’ 연주,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 천둥 같은 베이스와 드럼은 ‘히피족’들을 사로잡았다. 히피족은 인습적인 사고나 생활방식을 단호히 거부하는 대신에 평화와 사랑에 기초한 대안적 삶을 실천하는 젊은 미국인들을 가리켰다. 1967년쯤 히피문화가 런던에 보급되면서 유니섹스 스타일의 장발, 샌들, 낡은 청바지가 유행하였다.
일부 히피족들은 포크음악이 가지고 있는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요소를 모던 록이 가지고 있는 상업적 성격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으로 간주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영국에서 포크음악은 좌익 학생들, 보헤미안들, 아일랜드 출신 망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나중에 1970년대에 들어 페어포트 컨벤션, 스틸아이 스팬, 알비언 컨트리 밴드와 같은 그룹들이 성공하면서 포크록(folk rock)이 영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화려한 스타일
1970년대 포크음악과 일렉트립 팝의 요소들을 결합한 ‘제 3의 방식’(Third Way)이라는 새로운 음악 형식이 나왔다. 초기 대표주자로는 마르크 볼란과 데이비드 보위를 들 수 있다. 1971년에 볼란은 록그룹 T. 렉스를 조직하였으며, 번쩍거리는 장식을 한 의상과 화장을 한 그의 스타일은 대담하고 도발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엄청난 선전효과를 가져왔다. 1971년에서 1973년의 기간에 이들은 ’Ride a White Swan', 'Get it On', 'Jeepster', 'Hot Love'를 위시한 히트 싱글을 연속적으로 발표하였다. 이들은 꿈꾸는 듯한 시적인 목소리에 신나는 전기악기의 사운드를 결합하여 쾌락주의와 섹스를 찬미하였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 새로운 경향을 저속하고, 겉치레에만 신경을 쓰는, 매우 상업적이며, 예술성보다는 교묘한 술책에 중점을 둔 것으로 평가하였다.
데이비드 보위
1970년대 초에 데뷔하여 오랫동안 변함 없는 영향력을 과시한 연주가로 데이비드 보위(데이비드 존스, 1947년생)를 들 수 있다. 그는 가수 겸 작사,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로 영국의 대중가수들 중에서 사회적인 영향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1969년에 싱글판 겸 앨범 Space Oddity를 발표하자마자 대성공을 거뒀다. 포크음악에 기초한 이 창작곡은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의 시각에서 본 꿈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위는 1971년에 Man Who Sold the World 앨범을 냈다. 홍보 차원에서 그는 번쩍거리는 장식을 달고 화장을 하였으며 심지어 드레스까지 입었는데 이러한 그의 행위는 당시에 금기시 되었다. 그는 신비한 대중스타에 관한 연속적인 노래인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1972)를 만들었다. 이 음반은 비평가로부터 대중음악 최초의 포스트모던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3-4년에 연출한 무대 공연에서 그는 물감을 칠한 얼굴에 화려하고 도발적인 의상을 입고 자신의 양성(兩性)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물의를 일으켰다. 뒤이어 임박한 핵전쟁을 암시한 앨범 Aladdin Sane(1974)를 발표하였다. 실업, 파업, 인플레가 고조되면서 조지 오웰의 악몽 같은 미래를 그린 앨범 Diamond Dogs(1975)를 발표하였다.
섹스 피스톨
섹스 피스톨의 창립멤버들은 리드싱어에 자니 로튼(존 리든, 1956년생), 기타에 스티브 존스(1955년생), 베이스에 글렌 매트록(1956년생), 드럼에 폴 쿡(1956년생)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가죽재킷, 찢어진 옷, 안전핀, 나치표장, 자크, 클립, 장식 단추, 쇠사슬, 밝게 염색한 스파이크 모양의 머리 등으로 독특하고 도발적이면서 동시에 괴벽과 도착증세를 암시하였다. 섹스 피스톨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보수적인 음반 라벨로 유명한 EMI와 최초의 음반계약을 맺고 곧 데뷔 싱글판(‘Anarchy in the UK')을 발표하였다. 요란하고 원시적이며 적개심이 가득 찬 이들의 음악은 단순한 기타 독주, 반복 코드, 묵직하게 왜곡된 사운드, 도전적이고 갑작스런 결말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욕설과 거부가 뒤섞인 런던사투리로 격렬하게 노래를 불렀다.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사회자에게 욕설을 퍼붓는 행동으로 EMI로부터 해고당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시 당국에서는 지역주민의 보호 차원에서 이들의 공연을 취소하였다.
섹스 피스톨의 싱글판(‘God Save the Queen')은 1977년 엘리자베스2세의 즉위 25주년에 대한 풍자곡이다. 팬들의 관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코를 안전핀으로 뚫은 여왕의 모습을 광고에 이용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들은 반사회적 행동과 폭력에 연루되어 다시 해고를 당하였다. 섹스 피스톨은 영국에서 5개의 싱글판과 1개의 앨범에 25곡만을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반사회적 행동으로 인해 여러 앨범에서 약 50여 곡이 금지 곡으로 판정을 받았다.
팝음악: 저스트 두 잇(Just do it (yourself))
펑크음악의 수입으로 영국 전지역에 그룹들이 조직되고 연주활동을 하게 되면서 마추어의 음악창작이 활발해졌다. 팬들은 관심의 표시로 밴드를 향해 격렬하게 침을 뱉었다. 펑크의 전조와 상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음악적 언어였다. 십대들에게 이 새로운 음악의 형식은 전시소집령이 떨어진 것처럼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1976년에 댐드, 클래쉬, 잼, 스트랭글러즈, 버즈콕스 등은 빠르고 생동감이 넘치는 소박한 사운드로 연주를 하였다. 대부분의 그룹들은 모두 남성이었으나, 수지, 밴쉬스, 엑스레이 스펙스를 포함한 몇몇 그룹들은 여성 가수들을 두었다. 슬리츠의 경우에는 멤버 전원이 여성이었다. 이를 계기로 남성 리드싱어를 위해 무대 뒤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성의 역할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상업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펑크족이 추구하는 공동체정신이 희박해졌다. 1980년대 초반 ‘뉴웨이브’ 밴드들은 사실상 자신들만의 독창성을 상실하였다.
펑크음악에 대한 관심이 쇠퇴하면서 레게음악에 관심이 높아졌다. 초기의 펑크와 같이 레게음악은 보수당정부에 대한 상징적 도전이었으며, 국민전선의 극우적 인종주의에 대해서도거부감을 나타냈다. 여러 다인종 밴드들이 결성되어 팝과 레게의 대중적인 혼합곡(일명, 스카)을 연주하였다. 이 음악은 반인종주의를 주요 메시지로 삼았던 정치적 팝음악인 투톤(Two-Tone) 템포로 알려지게 되었다.
1979년에서 1982년의 기간에 설렉터, 스페셜, 비트, UB40과 같은 다인종으로 구성된 밴드들은 반대처리즘(anti-Thatcherism)의 도전적인 성명서를 발표하고 반인종주의 록(Rock Against Racism) 운동을 지지하기 위하여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의 무료공연을 가졌다. 이러한 시위운동은 흑인음악이 영국에 뿌리를 내리도록 도움을 주었다.
1976년에는 극우파 조직인 국민전선이 사용하는 전술의 실체를 대중들에게 똑바로 알리기 위하여 반인종주의 록이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과 함께 결성되었다. 1985년 7월에 이와 유사한 성격의 아프리카를 위한 공연인 라이브 에이드(Live Aid) 쇼가 미국의 필라델피아와 영국의 런던에서 동시에 열렸다. 이 공연들은 기근구제기금을 모으기 위해 가수 밥 겔도프가 기획하였다.
클럽과 거리문화의 혼합
1970년대 영국의 디스코텍에서 가장 인기있는 댄스음악은 비지스의 곡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영국인그룹이었다. 이들은 미국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1977)의 사운드트랙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에서 존 트라볼타는 젊은 주인공 토니 마네로 역을 맡았다. 그는 낮에는 페인트가게에서 단조로운 일을 하고 밤에는 ‘댄스홀의 왕’이 된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3천만 장이 판매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개리 누만, 헤븐17, 스팬다우 발레, 휴먼리그, 비시지, OMD, 디페치 모드를 포함한 밴드들은 신서사이저와 테이프를 이용하여 절제되고 세련된 미래 팝 및 댄스음악을 만들었다. 이 밴드들과 이들의 팬들은 뉴 로맨틱스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들 스타일의 특징은 부유함을 과시하면서도 냉정하고 초연한 자세였다.
미국의 뉴욕과 시카고의 거리에서 ‘랩(rap: 대중적인 시/웅변의 한 형태)’의 강렬하고 새로운 사운드가 들렸다. 나중에 ‘스크래칭’으로 알려진 기법이 도입되어 DJ들은 소음을 확대하기 위해 비닐 디스크를 손으로 이리저리 돌렸다. 이 소리들이 녹음되어 새로운 혼성음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랩과 ‘스크래칭’에 곧이어 ‘샘플링’이 대두되면서 미국의 댄스음악은 다양해졌다. 즉, 다른 음반에서 발췌한 음악을 녹음하고 혼합하기 위해 견본채취장치가 사용되었다. 가격이 저렴한 이 채취음악은 정교한 음의 콜라주 제작에 곧 사용되었다. 이 새로운 기법은 대중음악의 혁명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뮤지션들과 작사작곡자들이 점차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들이 타인의 음악을 훔치고 모방하는 ‘음의 무법자’라고 매도한 반면에, 다른 비평가들은 누구나 기존의 곡을 ‘공정하게 이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옹호하였다.
미래 지향적인 댄스음악
1980년대 중반 영국에 뿌리를 내리게 된 하우스음악과 더불어 새로운 창작기법들이 활성화되었다. 1970년대의 디스코/펑크와 가스펠 스타일의 목소리, 묵직한 베이스 및 드럼이 혼합되고 컴퓨터 기술과 신서사이저를 이용하였다. 이 음악은 격렬한 댄스에 적합하였다. ‘하우스’라는 명칭은 시카고에 있는 동성애자 클럽인 웨어하우스에서 유래하였다. 하우스 음악의 과격하고 자유분방한 사운드는 영국 댄스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리버풀과 맨체스터에서도 채택되었다.
1960년대 이래 지중해의 스페인 섬 이비자(Ibiza)는 영국인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였다. 1988년부터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으로 알려진 이 노천파티에 수천 명이 참여하였다. 이 사건은 소위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 운동의 서막이었다. 여기서 ‘하우스’ 음악을 들으면서 흔히 ‘애시드’(acid: 일종의 각성제 암페타민으로 LSD는 아님)로 알려진 마약 ‘엑스터시’가 남용되었다. 대부분의 팬들에게 이것은 1960년대 후반 이후 볼 수 없었던 쾌락주의, 댄스, 집단적 광기로 이루어진 신생 하위문화의 핵심요소였다.
음악도 더브, 랩, 록, 하우스음악 및 유럽 각지에서 온 전자음악 등 다양했다.
새로운 전자음악의 가능성으로 인해 다양한 하위장르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스타일의 하나가 ‘테크노’였다. 귀청이 찢어질 듯이 강렬하고 최면적인 이 음악은 미래형 전자 ‘삐삐(호출장치)’와 강력한 베이스를 특징으로 하는 강하고 반복적인 전자 사운드로 이루어진 댄스용 ‘펑크 록’이었다.
1980년대 이비자 파티의 분위기를 재현하고자 빈 창고, 때로는 런던의 M25 순환도로와 같은 거대한 장소에서 불법적으로 행사가 개최되었다. ‘창고 파티’ 또는 ‘레이브(소란스러운 파티)’로 알려진 이 행사에서 군중들은 경찰이 제지할 때까지 며칠 밤낮을 춤추었다. 그러나, 1994년 보수당정부는 형사법(刑事法)을 적용하여 레이브를 금지시켰다. 새로 제정된 법에 따라 모든 종류의 올터너티브 생활방식이 법적 제약을 받게 되고, 댄스파티가 정치적 쟁점이 되면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연대하여 반정부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반대 때문에, 댄스음악은 수그러들지 않고 1990년대 초를 풍미하였다. ‘하드코어’의 속도와 어두운 분위기, ‘정글’의 강렬한 드럼과 베이스, ‘고아(Goa) 황홀경’의 몽상적인 뉴에이즈 사운드, ‘거라지(garage)’의 솔(soul) 풍의 관능성 등이 팬들은 사로잡았다.
1990년대 중반 영국의 댄스음악은 다양한 인종적 특색과 음악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형태로 정기적으로 나왔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음악에 대해 음악적 계보가 없는 하이브리드음악에 불과하다고 평가를 내린다.
브리트팝(BritPop)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는 1960년대 중반 백인에 기반을 둔 영국 및 미국의 팝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였다. 프라이멀 스크림, 지저스 앤 매리 체인, 스미스 등은 자기성찰과 비관주의적 색채를 띤 클래식 사운드를 재현한 밴드들이었다. 기타(guitar) 밴드들이 전자댄스음악의 대안으로 제시되었지만, 처음에는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오아시스, 블러트, 펄프, 베르베, 스톤 로즈, 라디오헤드 등이 1990년대 후반 영국 팝음악의 독특한 사운드를 갖추고 등장하였다. 이 ‘브리트팝’으로 불리는 새로운 영국 음악의 ‘물결’이 국제적으로 음악무대를 휩쓸었다. (브리트팝을 연주하는 유명 밴드들의 대부분은 런던이나 맨체스터 출신의 잉글랜드인이었다.)
1990년대 대중 음악에서 새로운 사건은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5인조 그룹 스파이스 걸의 등장이었다. 스캐리, 스포티, 베이비, 포시, 진저는 오디션에서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선발되었다. 이들은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노래와 춤을 본격적으로 교습 받았다. 팬들은 8-12세의 연령층이며, 어린 자녀를 둔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당시 공전의 히트상품인 ‘스캐리’와 ‘베이비’ 미니인형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스파이스 걸은 어린 팬들의 우상이 되었다. 이들의 첫 앨범 Spice는 1천6백만 장이 팔렸다. 1996년부터 2년6개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스파이스 걸은 비틀즈 이후 최대의 성공을 거두었다. 스파이스 걸은 도발적인 성적 능력 즉, ‘소녀의 힘’을 가지고 평등사상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브리트팝과 댄스는 1990년대 후반 영국을 풍미하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면서 영국은 음악, 창작, 문화적인 측면에서 스스로 독창적인 길을 가고 있다.
'PP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러 가지 피임법 (0) | 2014.04.24 |
---|---|
아동복지의 의의::개념 ,이념,목표,철학,기본전제 (0) | 2014.04.18 |
유분증과 변비 (0) | 2014.03.07 |
미국사 나름 요점정리 (0) | 2014.02.09 |
I Swear-올포원(All-4-One) (0) | 2013.12.27 |